철작가, MZ가 세상을 대하는 가장 합리적인 태도
부질없다는 '허무주의'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 본문
무가치함을 받아들이는 가치로움
인생영화를 꼽으라 하면 내 픽은 언제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원스'이다. 이전엔 크리스토퍼 놀란이 신작을 개봉할 때마다 인생영화가 바뀌었던 나의 갈팡진 취향을 강제로 정착시킨 명작이다. 익살스러운 영화의 포스터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이 영화의 대표적인 평은 'B급 흉내를 내는 S급 영화'라는 말이다. 주인공과 악역은 우주(멀티버스)를 넘나드며 다양한 모습으로 싸운다. 여기서 악역은 '허무주의'를 이미지로 구체화 한 인물이다. 결국 허무주의를 이겨내고 이내 악역까지 포용하는 주인공은 '능동적 허무주의'이다. 이렇게나 무거운 철학적 관념을 출력하기 위한 이미지로 '손가락이 소시지로 되어있는 세상', '항문에 무언가를 꽂은 채 격투를 벌이는 남자 둘' 따위로 표현하다니, 미친 게 아니면 천재가 분명하다. 이 영화의 배경이 다중우주의 멀티버스라는 점도 상당이 흥미롭다. 주인공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우주는 각각이 선택의 결과로 형성된 두 가지 이상의 우주로 갈라진다. 이렇게 수만개의 우주에는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다른 세계의 주인공들이 살고 있다. 이러한 우주적 관점은 '다중우주 LEVEL 2 유형'에 가까운데, 다중우주론 또한 너무 흥미롭고 긴 얘기여서 나중에 다른 글에서 따로 조명해 보겠다.
영화의 악역은 모든 우주의 자신을 다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갖는다. 어느것이던(everything), 어디에서든(everywhere), 한 번에(all at once) 존재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경험을 전부 해본 악역의 결론은 한가지다. '부질없다'. 허무주의다. 돈이 삶의 목표였던 사람이 엄청난 돈을 번 것처럼, 다양한 경험이 삶의 목표였던 사람이 모든 경험을 다 해본다면, 그다음은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더 나아가서, 우주가 탄생한 후 영겁의 시간 속에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존재하는 인류라면, 우리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간이 우주 안에 먼지 같은 존재라면,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보편적인 진리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
삶의 기준에 대한 실질적인 방임이 팽배했던 시대가 있었다. 19세기 고통스러운 역사를 감내하던 유럽문화에 이러한 허무주의가 만연했던 것은 필연적이다. 어제보다 더 참담한 오늘이 반복되는 삶을 버텨야 하는 당시의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전까지 적용되던 전통과 권위, 도덕과 종교 같은 것들이 고통에 잠식되어 갔다. 신을 포함에 믿어왔던 모든 담론들의 절대적 가치가 무너져가고 절대절 외로움과 불안감이 그 자리를 차지했을 때 니체는 말했다. "신은 죽었다"
허무주의(Nihilismus)의 어원인 라틴어 nihil은 비존재함, 즉 무(無)를 말한다. 니힐리즘은 19세기 중엽 격변기에 서구 근대 시민 사회의 가치체계가 붕괴되는 역사적 전환기에 소시민층의 세계관이 반영된 철학이다. 현대에서의 니힐리즘은 절대적인 진리나 도덕적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을 대변한다. 우주 안에서 인생의 진상을 무(無)로 보는 시각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배신감과 허탈감을 가져다준다.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 고통스레 스펙을 쌓아가는 젊은이들, 승진을 위해 결핍된 수면욕을 카페인으로 수명과 맞바꾸는 직장인, 사후를 위해 현세의 행복을 저축하는 종교인들의 노력이 무(無)가 되는 것은 아무래도 정의롭지 않다. 이에 니체는 '수동적 니힐리즘'과 '능동적 니힐리즘'의 두 가지 유형을 제시한다.
'수동정 니힐리즘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담론들이 무가치함에 좌절당하고 소모적인 삶에 빠져버리는 방식이다. 허무한 현실에서 도피하여 쾌락주의 또는 무관심함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능동적 니힐리즘' 또한 담론과 권위의 가치들이 무의미함을 받아들인다는 면에서 수동적 니힐리즘과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무너진 가치 위에 새로운 가치를 자유롭게 창조한다는 점에서 더욱 능동성을 갖는다. 허무를 허무로 받아들이고 충분히 절망하여야 한다. 권위적이던 의미가 사라진 터전에는 새로운 가치를 자유로히 창조할 수 있다. 즉, 자신만의 행복과 성취를 누릴 수 있는 새로운 기준들을 세워 올릴 수 있다. 타인의 권위적인 시산에 속박되어 묻혀버린 자신의 삶과 행복의 의미들을 분명하고 단순하게 회귀할 수 있다. 자기중심적이지만 현실적인 안정감을 잃지 않는 방법인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주만큼이나 숭고한 것이 숨어있다. 그것은 도덕 법칙과 더불어 개시되는 신성불가침의 자유이다. 자유는 인류 전체와 더불어 이루어가야 할 윤리적 과제를 일깨우면서 우리를 한없는 높이의 소명 의식으로 고양한다. 그때 우리는 별에서 오는 불안을 벗어나 광대한 우주를 껴안을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우주라는 무의미의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허무주의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고, 그 위에 의미로 가득한 역사적 삶을 다시 희망할 수 있는 것이다."
- 칸트 『실천이성비판』中 -
영화에서 주인공이 악역과 같은 능력을 얻고 모든 우주의 경험을 독식하고 난 후 그녀 또한 니힐리즘적인 깨달음을 갖는다. 그렇게 세상 모든 것을 무(無)로 회귀시키자는 악역의 말에 동조하여 행하려 하는 순간 그녀는 한층 더 높은 차원의 능동적 니힐리즘에 도달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주인공이 그의 딸이기도 한 악역에게 얘기하는 대사가 이 영화 전체를 포괄한다.
" Then I Will Cherish These Few Specks Of Time" (그럼 난 그 몇 점의 시간을 소중히 할 거야)
* 추신) 요즘은 낙관적 허무주의적 의식이 사람들 사이에서도 익숙한 듯하다. 다양한 매체에서 쉽게 그 의미와 방식에 대해 배울 수 있다. 많은 매체 중에 쿠르트게작트의 유튜브 영상을 하나 추천한다.
https://youtu.be/oBIo2AyjNMo?si=odjtY4_fnhP6jPNW
'집필中 [MZ로 세상 대하는 가장 합리적인 태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에 의미가 꼭 있어야 하나요? - MZ로 세상 대하는 합리적 태도 (0) | 2024.01.09 |
---|---|
죽음에 대한 태도 - 탄생보다 죽음이 많은 나라에서 MZ로 살기 (2) | 2024.01.07 |
'경험'은 '돈'보다 숭고한가? - 앤서니 보데인 (0) | 2024.01.05 |
인류의 출현 - 우주 안에 작은 인간의 존재 받아들이기 #2 (2) | 2023.12.26 |
우주의 탄생 - 우주 안에 작은 인간의 존재 받아들이기 #1 (1) | 2023.12.26 |